최홍원 펜화展
1995년 5월17일~5월23일 / 서울 관훈 미술관
나의 작품세계
나는 유화와 함께 펜화를 즐겨 그린다. 그린다는 것 자체에 다른 어떤 구차한 해석을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펜화가 갖는 특징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우선, 흑백이 교차되는 대비의 묘미 (나는 이것을 자연의 섭리로 본다)와 금속적인 예리한 선으로 명암과 물체의 농담(濃淡)표현이 용이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소요시간이 짧기 때문에 처음의 이미지를 지속하여 표현할 수 있고, 한번 그린 선은 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성까지 적당히 처리하는 부분이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내가 펜화를 시작한 것은 6.25당시 군복무 시절 때부터였다. 전쟁과 폐허, 이념의 극한 대립 속에서도 나를 유지시켜 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린다는 것에 대한 여러 조건들이 열악했던 혼란의 시대였던 만큼 펜화는 무엇보다도 시간적 • 공간적 제약을 비교적 적게 받았으므로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가장 적절한 표현 수단 중의 하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 끝난 1953년 나는 전쟁 속에서 철저하게 일그러진 우리 삶의 단편들을 펜화로 표현한, 몇 몇 작품들을 모아 대구와 서울에서 전쟁화전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쉽게 치유되지 않는 전쟁의 상흔들은 그 후 60년대 나의 그림 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통해 다시 나타나게 된다. 당시 단테의 신곡을 펜화로 그리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2절 지 크기의 화면에 선과 면, 흑백의 극한 대비를 통하여 삶과 죽음, 그리고 표류하는 나약한 인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약 100점) 새가 중심 소재로 나의 그림에 등장한 것도 이 때 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향을 북에 두고 온 까닭도 있었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이념이나, 감정의 퇴적을 초월한, 자유 의지의 상징'으로 지금까지도 나의 그림 속에 새가 의인화되어 자주 등장한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무중력 시리즈 (50점, 4절지), 교통 신호판 주제 시리즈 (60점, 4절지)와 해산물, 새, 곤충 시리즈 (40점, 4절지) 등 자연에서 발췌한 소재들, 그리고 음악 악보 시리즈 (60점, 4절)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자연과 인간을 관찰 하는 내 사고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80년대에는 인간 시리즈 (120점), 풍경 시리즈 (150점) 그리고 불교시리즈를 펜화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민족적 미감이나 신화성에 밀착해서 불교와 토속신앙의 상관관계에서 비롯된 우리의 근원적 정신세계나 역사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들은 90년대의 새 시리즈, 서낭당 시리즈에도 깊이 연루되는데 우리의 무속성이나, 신화적 원형성을 어떤 사조나 경향에 구애됨 없이 민족적 정서에서 해석하고 싶었던 것이다. 500나한 (500점)도 이런 맥락에 기초하여 그려졌다. 하겠다. 현재 내 그림의 주된 주제로는 서낭당이나, 불교에 관한 것, 그 리고 새가 다루어진다. 특히 불화는 단순한 소재로서의 불상 자체의 이미지보다는 불법(佛法)의 세계에 대한 조형적 접근을 시도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그린 펜화는 약 1,500점 정도이다. 유화 1,100점, 수채화를 제외한 기타 연필이나 콘테, 매직, 크레파스, 파스텔 작품 500점을 합하면 3,000점이 넘는 셈이다. 물론 작품의 많고 적음이 작가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림만은 있는 그대로 정직하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조형 논리에서의 상투적 표현성, 또는 그것의 형식적인 이미지 배열 방식에서 벗어나 나는 앞으로도 쉼 없이 그려 나갈 것이다. 그것만이 나를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창한 시대적 평가나, 화가로써의 직업의식에 구애됨 없이 단지 그린다는 것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금년의 계획으로는 안성 도피안사의 요청으로 폭 0.91m, 길이 250m에 이르는 500나한도 (유화로 제작예정)를 7월에 착수하여 1년간의 작업과정을 거쳐 완성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 다른 작품 (유화나 기타 재료로 그린작품)을 배제 하고 오직 펜화만을 전시하는 것은 펜화가 갖는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나 나름대로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1995. 5. 崔 洪 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