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복 영 미술평론가⋅서울예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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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원 화백이 1995년 정년퇴임을 계기로 펜화 전을 가진 바 있으나 본격 회화 전을 갖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감회가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와병 중에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정성으로 이루어져 뜻을 더하고 있다.

글 머리에 이 말을 하는 건 그의 예술 반세기를 기리는 전시가 그 스스로의 전시 의욕에 의해서보다는 제자들의 아쉬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서다. 한 길을 걷는 예술가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역사에는 나홀로 정진하는 사람들이 예술과 과학에 획기적으로 기여하는 예가 적지 않다. 그들의 업적이 왜소하지 않고 출중할 경우엔 곧바로 위대한 문화자산으로 주목받는다. 서구 현대미술의 경우, 일생을 엑상 프로방스의 산자락에 은둔했던 세잔느를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을 것이기에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 근현대사에도 이러한 예가 없지 않겠으나, 대개는 소박한 자연주의에 머무르고 있어 ‘이 작가를 보라!’고 할 만한 경우가 많지 않다.

이번 최 화백의 예술세계를 기리는 제자들이 전시의 기별을 전하기까지는 필자 역시 최 화백의 실상을 알 길이 없었다. 그의 작품의 일부를 접한 후에야 나의 평론생활 40년사에서 이처럼 반가운 일이 또 있을까싶도록 최 화백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최 화백의 예술은 자신의 생애를 자신의 존재이유를 걸고 투쟁하듯 달린 끝에 이룩한 고유한 필세와 완성도를 이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일견해서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가 일체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아 더 신선해 보인다. 이 모두는 작가의 자기 탐구의 열정과 은둔자적 삶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더욱 소중한 것이다.

이 평문에서 다루어야할 건 그래서 막중하다. 그러한데 이번 전시가 20호 소품 32점으로 제자들이 조용히 모신다 하니 본격 논평은 후일 대작전에 즈음해서나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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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 논의를 위해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건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에서 본 최홍원 예술의 이종異種적 위치와 의의에 대해서다. 일컬어 ‘잊혀진 상상력의 복원’으로 이를 요약할 수 있지 않나싶다. 그 만큼 그의 회화는 우리 현대미술이 지금까지 잊고 있었거나 갖고 있지 않은 영역이어서 그 의의가 실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현대미술 반세기는 상상력의 사각死角 지대, 아니면 불모의 지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서구의 모더니즘을 우리의 형질로 바꾸고 소화하려는 데서 이루어진 필연적 결과였다. 서구의 현대미술 담론가들이 늘상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회화의 표면이 어떻고 지지체가 어떻고 하다 보니, 우리의 원본原本을 잊고 서구의 부본副本을 만드는 데 급급하였다. 우리의 원본은 원래 강서 대묘의 벽화나 「몽유도원도」에서 보듯이 상상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뿌리가 서구동점西歐東占의 과정을 통해 모조리 압살되었다. 2천 년대에 들어 서구세계는 그들이 창도한 근대세계를 부수고자 그들의 상상계를 맹렬히 추격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 사실을 간과한 채 사회의 물질화와 소비사회의 중압감에 눌려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할 때, 일찍이 알려지지 않은 한 노화가의 저 일필휘지의 필세가 보여주는 위력은 가히 놀라운 데가 있다. 그의 필력은 천재를 희롱할 뿐 아니라 초탈의 상상력에 불을 댕긴다. 상상력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우리의 1950~60년대 신사실파 거장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그들과 천재를 겨룬다. 다듬고 만들어낸 우아함도 없는데 우아함에 눈먼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때린다.

그의 예술은 우리의 무속과 습속에 내재된 원초의 상상력을 그 자신의 것으로 전유專有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게 무엇인지 주석을 달자면 우리의 근대회화를 지배해온 ‘물질의 상상력’material imagination과 정반대의 것이다. 신사실파 작가들처럼 자연을 앞에 하고 추진되는 상상력도 아니다. 물질의 상상력은 물질을 조작하는 데 받쳐질 뿐이다. 자연을 앞에 한 상상력 또한 자연을 변형하는 데 받쳐질 뿐이다. 최 화백의 상상력은 이것들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의 경우는 우리 민족이 내재하고 있는 본원적 ‘상상계’imaginary world에서 발진되는 상상력이다. 그의 상상계는 우리 민족이 태초와 태곳적부터 간직하고 지탱해온 신화적 무의식을 시원始源으로 한다. 의식과 지각은 물론 전前의식과 전前지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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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원 화백이 어떠한 경로를 밟아서 우리의 잠재적 시원에 불을 지피는 데 이르렀는지,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가 무엇을 붙잡고자 했는지가 물어져야 한다.

그의 자전적 언급 (1995, 5)에 의하면, 그의 상상력은 시종 ‘새’를 그 자신의 ‘대리물’로 등장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새를 앞세움으로써 상상계의 비상飛上이 이루어졌다. 그의 새는 1950년대 전쟁의 참화 중에 발아해서 1960년대 초 인간의 본질과 죽음에 대한 반추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1990년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중 서낭당이나 불화에 이르기까지 시종 등장하고 있는 주제다. 그의 전 회화를 지탱하고 있는 모팁이 새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출품작 중 <새>를 명제로 한 것만도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부엉이>, <태양조>, <형이상학적인 새>를 합치면 단연 <새>가 그의 세계를 지배한다. <서낭당> 같은 명제들에서는 새의 눈동자가 주를 이룬다. <사람>에서도 비상할 듯한 새 모습을 한 사람들이 것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어언 반세기를 새와 같이해 왔고 새를 그 자신의 인격적 대리물로 삼아왔다.

그가 그리는 새는 거의가 이름붙일 수 없는 상상계의 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응시하듯 사람의 눈동자를 닮은 새는 영낙없이 작가 자신이다. 여기에다 벼슬을 달고 있는 머리, 가느다란 긴 목, 육중하고 견실한 날개를 한 동체, 긴 다리의 공작류와 학류, 수리과의 새와 큰 눈 부엉이가 그의 인간적 일면을 시사한다. 이들의 표정은 단연 우리의 태고적 우주새인 삼족오를 상기시킨다. 이들에다 여성의 가슴과 힙을 융합시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새를 등장시킨다. 두 발을 제외하면 삼족오에 진배없다. 그 자신을 위해 이상화시킨 상징물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 때문에 최 화백의 상상력은 새의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장욱진 화백의 참새와 까치에서 볼 수 있는, 심안에서 살고 있는 새들과는 경계가 다르다. 그의 새는 우리의 유구한 신화적 상상계에 살고 있는 새들이다. 무엇 때문에 최 화백이 이들을 등장시키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애초 그의 새는 1950년대 군복무시절 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 이 시절의 새를 그의 「작업노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53년 나는 전쟁 속에서 철저하게 일그러진 우리 삶의 단편들을 펜화로 표현한 몇 몇 작품들을 모아 대구와 서울에서 전재화전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쉽게 치유되지 않는 전쟁의 상흔들은 그 후 1960년대 나의 그림 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통해 다시 나타나게 된다.

당시 단테의 「신곡」을 펜화로 그리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 ... ] 선과 면, 흑⋅백의 극한대비를 통하여 삶과 죽음, 그리고 표류하는 나약한 인간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새가 중심소재로 나의 그림에 등장한 것도 이 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작업노트」, 1995, 5).

그의 새의 상상력은 1950~60년대에 시작해서 1970~80년대의 무중력, 교통신호판, 해산물, 곤충, 악보, 인간, 풍경, 불화를 거치면서 민족적 미감과 신화 등 우리의 태초의 정신세계와 역사성에 주목함으로써 그 위상이 확실해졌다. 새가 그의 대리물이자 알레고리로 줄곧 등장한 건 전쟁세대의 작가가 경험했던 삶과 죽음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뭇 인간의 실존을 구원하려는 데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애초부터 상투적 표현이나 형식주의적 조형성을 거부하였다. ‘나를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쫓아 자유의 행보를 걸었다. 오직 ‘그린다는 그 자체’가 곧 그의 참 모습임을 확인시키려 했다. 그는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슴에 묻어놓은 한恨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새의 상상력은 그 자신의 개인적 실존의 산물이면서도 우리 민족의 원형충동에 호소함으로써 생명력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의 상상력은 개인과 민족이라는 두 세계를 연계하는, 이를테면 모세혈관의 구실을 해왔다. 새는 이 두 세계를 왕래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필세는 새가 날듯 일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가꾸고 꾸미는 대신 거반 자동기술적으로 이루어졌다. 흑과 백 외에도 녹⋅청⋅적⋅황⋅자 같은 오정간五正間색들을 종횡으로 구사하였다. 운무와 윤동, 선필과 컬러밴드를 중심으로 집중구조와 분산구조를 넘나들었다. 새는 비상하는 자세와 잠시 지표에 정지한 품새로 보는 이의 시선을 노리고 붙잡는 마력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생각한다. 이쯤이면 그의 상상력이 우리 현대미술에 자리할 위치를 확실히 지정해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야만 우리 현대회화에서 잊혀진 장르가 건재하고 있음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수평화되고 굳어진 물질적 상상력으로는 우리 현대미술은 왜소함과 단조로움을 면할 수 없다.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다. 왜 우리라고 북구의 표현주의에서 볼 수 있는 상상계에 기반한 회화를 가져서는 안되는가? 왜 우리는 안젤름 키퍼 같은 역사화나 아르테 포베라에서 보는 것 같은 우리 나름의 버전을 가져서는 안되는가? 우리도 인간이고 민족의 역량이 열등한 것도 아닌데, 한 낱 회화를 구성하는 부수물인 물질적 표면에만 매달려 있으란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 현대미술의 역량을 좀더 다양화시키지 못한 죄(?)는 우리가 결국 미술경영을 잘못해서가 아닌가? 이제 우리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더 이상 물질계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내재해 있는 상상계를 이끌어내어 하늘을 비상하는 회화를 적극 권장하고 추진해야 한다. 최홍원 화백의 선구적인 몸짓이 이를 시사하고 촉고한다.

2011, 4